유소기(劉少奇)는 어떻게 중공의 2인자에 오를 수 있었을까?

글: 궁행객(躬行客)


왜 유소기였을까?

연안정풍(延安整風)이후 형성된 영도그룹의 2인자는 왜 유소기였을까?

2인자라는 말은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고, 실질적인 근거가 있다.

1943년 3월, 연안에서 개최된 정치국회의에서, 임필시(任弼時)가 초안한 <중앙기구조정 및 정간(精簡)에 관한 결정>이 통과되었고, 이 결정의 가장 큰 의미는 정치국, 서기처 및 그 산하기구의 직책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호교목(胡喬木)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강생(康生)은 회의에서 이 기구조정의 협의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소기(少奇)동지의 의견에 따르면, 서기처(書記處)에는 주석을 1명두고, 나머지 2명의 서기는 주석의 조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연석회의의 형식으로 일상업무를 처리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후 회의선거를 거쳐, 3명의 서기처 서기, 교원(敎員, 모택동의 별칭), 유소기, 임필시를 선출한다.

교원의 제안에 따라, 유소기는 군사위업무에 참가하고 부주석중 1명이 된다.

그외에, 2개의 정치국과 서기처를 보조하는 조력기관을 둔다. 하나는 선전위원회, 다른 하나는 조직위원회이다.

선전위원회의 구성원은 교원, 왕가상(王稼祥), 박고(博古), 개풍(凱豊)의 4명이고, 교원이 서기, 왕가상이 부서기를 맡는다.

실제업무에서 이 위원회의 주요업무는 왕가상이 책임졌다. 왜냐하면 교원은 전체국면을 영도하는 업무를 하여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때문이다.

또 다른 조직인 조직위원회는 8명으로 구성되었따. 유소기, 왕가상, 강생, 진운(陳雲), 장문천(張聞天), 등발(鄧發), 양상곤(楊尙昆), 임필시. 유소기가 서기를 맡는다.

당시 선전과 조직 두 방면의 보면, 정풍기간동안 가장 핵심적인 선전업무는 교원이 주관하고, 조직방면의 업무는 유소기가 주관했다.

이 의미는 아주 분명하다. 화북, 화중의 관건적인 순간에 교원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전보를 보내, 유소기를 연안으로 부르고, 그가 연안으로 오는 동안 연도의 동지들에게 유소기 동지의 안전을 주도면밀하게 안배하도록 요구했다.

유소기가 연안으로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즉시 그의 당내지위가 올라가고, 그는 여러가지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된다.

교원과 유소기가 각각 한 분야의 업무를 책임졌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유소기가 2인자라는 지위가 기본적으로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왜 유소기인가?

유소기에 관해서는 1편의 글로는 부족하고, 적어도 2,3편은 써야 한다.

여기에서는 유소기의 초기 경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유소기의 초기경력을 그다지 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전체 글은 12,000자에 이르니 천천히 살펴보기 바란다.

그의 경력을 설명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교원이 왜 유소기를 좋게 보았는지.

1) 유소기, 임필시, 교원은 모두 호남(湖南)사람이다. 임필시는 소경광(蕭勁光)과 함께 교원이 조직한 러시아연구회를 통해 러시아유학을 다녀왔다.

비록 유소기도 교원이 장사(長沙)에 건립한 채널을 통해 러시아유학을 다녀왔지만, 그의 러시아유학은 임필시등보다 훨씬 우여곡절이 있다.

유소기는 1898년생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했고, 배우는 것도 빨랐다. 당시 그는 학교 1등의 성적으로 녕향현(寧鄕縣)제1고등소학을 졸업했다. 이 학교는 나중에 옥담학교(玉潭學校)로 개명된다.

소학교졸업후, 유소기는 교원과 같은 곤경에 처한다. 계속 공부하고 싶었으나 갈 곳이 없었다. 당시 좋은 중학교는 모두 장사에 있었고, 그들처럼 어려서부터 작은 산촌에서 자란 아이들은 장사까지 갈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유소기는 아주 재주가 있었다. 이전의 선생을 찾아가서, 추천장을 받는다. 추천장을 받은 후 몇몇 동문들과 함께 걸어서 장사로 간다.

지금 살았더라도 유소기는 입시천재였을 것이다.

당시 장사의 중학교에서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유소기는 제1중학과 장군중학(張郡中學)에 입학시험을 친다. 이 두 학교는 장사에서 가장 유명한 학교였다.임필시와 소경광이 바로 장군중학 졸업생이다.

그는 두 학교에 모두 합격했다. 그리하여, 그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유소기는 어느 학교로 가는 것이 좋을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다.

장사망록원주성녕향중학(長沙望麓園駐省寧鄕中學)의 교장으로 있던 황석류(黃錫類)는 친구들과 얘기하다가, 녕향에서 온 유소기라는 기재가 있는데, 높은 점수로 장군중학과 제1중학에 모두 합격했다는 말을 듣는다.

황석류는 즉시 그를 데려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성녕향중학은 장군중학과 비교하면 차이가 많이 났고, 전혀 경쟁력이 없었다.

그러나, 황석류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그는 유소기가 머무는 곳으로 찾아가서, 주성녕향중학의 선생과 학생은 대부분 녕향현출신이어서, 친근하고 말도 잘 통하며, 학습분위기도 좋다고 말한다.

유소기가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자, 황석류는 추가로 제안한다. 학교의 학비도 싸고, 진학할 때도 우대해준다고 말한다. 유소기는 그제서야 약간 마음이 움직인다.

황석류는 계속하여 공격적으로 제안한다. 주성녕향중학에는 월반제도가 있어서, 유소기에게는 바로 2학년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1년을 적게 공부하고도 똑같은 졸업장을 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유소기는 그렇게 하여 주성녕향중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황석류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유소기는 학교를 절반도 다니지 않고 떠나버린 것이다.

1916년, 호남독군(湖南督軍) 담연개(譚延闓)는 장사에 강무당(講武堂)을 설립하여 군사인재를 배양할 준비를 했다.

막 "구탕(驅湯, 湯薌茗을 몰아내자는 의미임)"운동을 겪은 유소기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이 움직였다. 즉시 군사지식을 배워서 장군이 되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장사로 간 다음에야 알았다. 장사강무당에는 입학요건이 까다로웠다. 오직 상군(湘軍)의 군관(장교)만을 뽑았다. 그러나, 유소기에는 방법이 있었다. 자신의 군대에 있는 형 유운정(劉雲庭)의 도움을 받아, 막 군대에서 퇴역한 사람에게서 군관증(軍官證)을 구한다.

유소기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입학신청한다. 그리고 시험을 치렀고 높은 성적으로 합격통지서를 받는다. 이 경력은 주덕(朱德)이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에 입학했던 방식과 유사했다.

그런데, 사건이 터진다. 군사과목의 수업이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가 파괴된 것이다. 그렇다, 폭탄으로 파괴되었다.

당시, 호법군(護法軍)과 북양군(北洋軍)간에 전쟁이 벌어졌고, 전쟁의 불길은 호남으로 번졌다. 결국 쌍방은 장사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전장이 바로 장사육군강무당 바로 옆이었다. 양측간의 전투가 끝나자, 학교는 폐허로 변했고, 강무당도 이렇게 흐지부지 사라지게 된다. 유소기의 장군몽은 이렇게 끝났다.

실망한 유소기는 고향으로 돌아가 1년을 지낸다. 그러나 그는 교원(모택동)과 마찬가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공부하러 고향을 떠난다.

이때, 유소기는 대학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려면 반드시 중학졸업장(중학은 초중,고중이 있으며, 고중이 우리나라의 고등학교에 해당함)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유소기는 다시 중학교입학시험을 친다.

이번에는 장사육재중학(長沙育才中學)의 졸업반에 입학한다. 1년만 공부해서 졸업장을 딴 다음 대학에 입학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차질이 생긴다.

2) 1919년 5월, 54운동이 발발했고, 그후 일부 북경의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전국각지로 가서 강연을 했다. 등중하(鄧中夏)는 그렇게 장사로 왔고, 등중하의 강연을 들은 유소기는 흥미를 느끼고 북경으로 간다.

다행히 장사의 육재중학도 학생운동에 협력하여, 졸업시험을 앞당겨준다. 그리하여 유소기는 순조롭게 모든 시험에 통과하여 졸업장을 받고 북경으로 간다.

북경에 간 후에도 유소기는 계속 시험을 친다. 그리고 순조롭게 북경대학(北京大學)과 육군수의학교(陸軍獸醫學校)로부터 합격통지서를 받는다.

유소기에게 시험은 밥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북경대학은 그 당시 중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이었지만 유소기에게 학비도 비쌌고, 4년제여서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리하여 북경대학에 가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육군수의학교는 비록 학비는 무상이지만, 전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시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마도 강자들은 모두 시간에 민감한 것같다. 만일 유소기가 북경대학을 선택하여 공부했다면, 그는 분명히 인재로 성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5대서기중 한명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떤 기회는 놓치면 놓치는 것이다.

그때 유소기는 프랑스유학생에게는 정부의 보조금도 있고, 학비도 비교적 비싸다는 것을 듣게 된다. 그리고 당시는 출국유학이 유행이었다. 그래도 유소기에게는 학비가 비싼 편이었고, 유소기는 어떻게 하든 학비를 낮춰보려고 애를 써봤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정육덕학교(保定育德學校)의 입학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이 학교는 프랑스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일도 하면서 공부도 하는. 그리고 학비가 없을 뿐아니라 학제도 1년반이었다.

학교에서는 프랑스어를 가르칠 뿐아니라, 철공, 기계, 선반, 주형등의 기술도 가르쳤다. 이건 프랑스에 간 후에 일자리를 찾기 쉽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공부를 마치자 유소기는 발견했다. 정부의 보조금이 사라졌을 뿐아니라, 프랑스쪽에도 1차대전이 끝나면서 대량의 군인들이 사회로 나와 일자리가 부족했다. 그리하여 프랑스유학을 갔던 중국유학생들중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귀국해야 했다.

그러나, 유소기는 1년여동안 철공기술을 배웠다. 운명은 이처럼 기묘한 것이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 기술은 유소기가 일을 전개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하게 된다.

이리저리 돌다가 결국은 다시 장사로 돌아온다.

이때, 유소기는 마침내 교원이 조직한 러시아연구회를 만나게 된다. 이건 정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맥연회수(驀然回首), 나인각재등화란산처(那人却在燈火闌珊處).

(갑자기 머리를 돌려보니 그녀가 등불이 비치는 곳에 서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유소기는 일찌감치 러시아의 시월혁명에 감동받았지만, 러시아유학을 갈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교원이 만든 러시아연구회가 그 일을 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러시아유학의 학비가 매우 적다는 것이다. 러시아에 가면 먹고 자는 일을 모두 러시아정부가 해결해 주었다.

다만, 유소기는 교원을 통해 러시아로 간 것이 아니라, 선산학교(船山學校)의 교장이었던 하민범(賀民範)의 추천을 받아 직접 유학자격을 얻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러시아연구회를 만들 때, 하민범의 명성을 빌렸기 때문이다. 비록 교원이 실질적으로 책임졌지만, 많은 학생들은 그를 알지 못했었다.

유소기는 임필시와 함께, 먼저 상해외국어학사(上海外國語學社)로 가서 1년간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그후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간다.

나중에 5대서기중 한명이 되어 주석의 조력자가 되는 이 두 사람은 이렇게 만나게 된다.

다만 유소기는 임필시보다 나이가 많았고, 모스크바에서 공부한지 1년도 되기 전에 명령을 받아 귀국하여 구체적인 혁명사업에 종사하게 된다.

3) 거물들이 젊었을 때의 경력은 대동소이하다. 핵심은 항상 학습이다.

그들은 평범한 시기에도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평범한 출신은 그들을 겉으로 보기에 비교적 평범하게 보이도록 했을 뿐이다.

생활은 항상 공평하지 않았다. 부는 불공평했고, 출신은 불공평했으며, 개인의 지혜, 용기, 결단력도 불공평했다.

그저 노력하고 분투한다고 하여, 원하는 행복을 거둘 수는 없었다. 노력, 분투와 비교하면, 오히려 자신의 지위를 분명히 알고, 자신의 처지에 부합하는 목표를 확립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어쨌든, 유소기의 극본을 가지고 시간을 거슬러 그 시대로 돌아가더라도, 당신이 유소기가 될 수는 없다.

유소기의 첫 이력은 안원노광(安源路鑛)이었고, 그때 그는 겨우 24살이었다.

1922년 봄, 유소기는 모스크바에서 국내로 귀국한다. 그때 중공은 성립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유소기처럼 근정묘홍(根正苗紅)의 소련유학파 청년당원은 아주 희소했다.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다. 유소기야말로 진정한 시간관리대가라고.

그는 아주 어렸을 때, 시간의 중요성을 의식했다. 소학교를 착실하게 마치면서 전교1등을 차지했던 것을 제외하면, 중학, 대학, 유학은 모두 스스로 돌격하여 완성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절반도 되지 않는 시간을 들여 이 모든 것을 얻어냈다.

중학교를 두번 입학하였는데, 다 합쳐도 시간은 2년이 되지 않았다. 보정육덕중학에서도 1년반을 배웠다.

모스크바유학에서도 임필시등은 열심히 공부하였지만, 그는 9개월만에 순조롭게 귀국하여 혁명사업에 투신하여 인생의 새로운 역정을 개시한다.

유소기가 돌아오자, 중국노동조합 서기부에 배치되어 노동운동을 지도하는 부서를 책임졌다.

당시 중공이 했던 일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유소기는 돌아오자마자 중임을 맡는다. 시작점이 매우 높았다. 그리고 그건 구체적인 업무의 시작점이었다. 박고(博古)같은 사람들은 돌아오자마자 고위직이라는 높은 시작점을 차지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1922년 여름, 진독수(陳獨秀)가 유소기를 만나서 얘기한다. 진독수는 그에게 호남으로 가서 일하도록 하고, 그를 중공 상구집행위원회(湘區執行委員會) 위원으로 임명한다.

당시 상구집행위원회의 서기는 교원(모택동)이었다. 그외에 교원은 중국노동조합서기부 호남분부주임도 맡고 있었다. 그는 유소기의 직접 상사였다.

1922년 8월초, 유소기가 장사에 도착하여, 교원과 만난다. 이것이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이다.

그후, 유소기는 교원의 지시에 따라 이립삼(李立三)에게 가서 함께 호남학생연합회(湖南學生聯合會) 일을 한다.

연합회 일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곧이어 교원은 월한철로(粤漢鐵路, 광주-무한철로) 파업을 조직하기 시작한다. 먼저 곽량(郭亮)을 악양(岳陽)으로 보내 노동자를 조직했고, 그후 유소기를 장사로 보내 연도의 철로를 돕게 했다.

월한철로의 기세는 아주 컸다. 안원로광쪽의 노동자들도 움직였다. 파업을 통해 급여와 대우인상을 얻어내려 했다. 교원은 안원으로 가서 살펴본다. 그쪽이 도대체 어떤 상황이고, 파업을 하기에 적절한지 아닌지를 알아보았다.

중국에는 유명한 유화(油畵)가 있다. <모주석거안원(毛主席去安源)>, 이 그림이 가장 인기있을 때 관련부서의 통계에 따르면 9억여장을 인쇄했다. 이건 당시 중국전체인구보다 많았다.

안원노광은 당시 상구특위의 업무중점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의 노동자는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1만여명.

안원노광은 평향매광(萍鄕煤鑛, 광구는 평향현 안원진)과 주주(株州)에서 평향까지 철로의 합칭이다. 평향매광은 당시 중국에서 비교적 큰 광산이었고, 이곳에서 생산된 석탄은 호북(湖北)의 대야철광(大冶鐵鑛)에서 생산된 철광석과 합쳐서 모두 한양철창(漢陽鐵廠)으로 운송되었다.

운송의 편의를 위해, 평향매광에 철로를 설치해서 주주까지 건설하여 월한철로에 연결시켰다. 그후 철로 혹은 수로를 통해 석탄을 한양철창까지 운송한다.

나중에, 한양철창, 대야철광, 평향매광 3개를 합병하여 산업클러스트를 만들어, 당시 중국최대의 공업기업이 된다. 현재의 말로 하자면 일괄산업체인의 우세를 건립한 것이다.

그때, 안원노광에는 노동자 1만2천여명이 있었고, 철도노동자 1천여명이 있었다. 그외에 거기에는 4천여명의 실업자가 모여있었다.

이런 규모는 전국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였다. 중공이 노동운동을 벌이기에 절호의 장소였다.

또한 가장 손쉽게 성과를 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안원노광은 교원등이 중점적으로 공작했던 곳이고, 특히 이립삼이 이곳에서 각종 노동활동을 전개했다.

교원은 한차례 살펴본 후, 안원노광에서 노동자파업을 일으킬 시기가 성숙했다고 판단하고, 즉시 서신을 보낸다.

고향에 돌아가서 가족을 만나고 있던 이립삼이 불려왔고, 유소기도 월한철로쪽에서 안원노광으로 불려왔다.

9월9일, 이립삼이 안원으로 돌아온다.

11일, 유소기도 도착한다.

3) 유소기는 8월에 호남으로 돌아왔다. '실습기'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9월부터 만명이 넘는 노동자파업을 이끌기 시작했다.

일찍오는 것보다는 딱 맞춰 오는 것이 좋다.

당시 안원노광의 주요책임자는 이립삼이었다. 그는 노동운동을 벌였고,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많은 십장들과 깡패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그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고, 이립삼을 죽여버리겠다고 말하고 다녔다.

이번에 큰 파업을 벌이는데 일을 편리하게 처리하기 위해 이립삼은 막후로 숨어 전체 국면을 지도했다. 그리고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새로운 얼굴의 유소기가 전면에 서서, 전권을 가지고 노동자구락부를 이끌었다.

즉, 유소기는 오자마자 2인자가 된 것이다. 당국과 공장과 협상할 때 그가 나섰고, 깡패와 건달들의 인신위협에도 그가 가장 앞에 서서 막았다.

비교하자면, 실습기간의 대학생이 천명이 넘는 대기업을 이끌고, 수억짜리 프로젝트를 책임졌다. 이런 경험치는 일반인들이라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유소기는 그것을 가졌다. 그리고, 아주 잘 소화시켰다.

1922년 9월 14일, 유소기가 안원노광으로 온지 4일째 되는 날, 안원의 노동자운동은 정식으로 시작된다.

안원노국의 노동자들은 기차기관차의 중요한 일부 부품을 제거했고, 기무처(機務處)는 길을 막았다. 광산노동자들은 석탄수송을 중단시켰고, 모두 광구에서 나와 나무등 공구로 광구를 막아놓았다.

나머지 일들은 모두 노동자구락부에서 처리했다. 노동자들은 숙사로 돌아가 대기했다. 조직도 되어 있고, 기율도 잡혀 있었다.

유소기는 대표로서, 계엄사령부와 광국책임자와 담판했다. 손에 조건문서를 들고 계엄사령부로 직행했다.

"만일 계속하여 소란을 부리면, 대표부터 먼저 법에 따러 처결하겠다!"

유소기는 전혀 겁먹지 않고, 대답했다: "만여명의 노동자가 이렇게 요구하고 있으니, 만일 대표를 칼로 베어 고깃덩이로 만들더라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계엄사령관은 다시 말했다: "나는 만여명도 처벌할 방법이 있다. 나는 만여명의 군인이 있다!"

유소기는 분노하여 소리쳤다: "그럼 한번 제압하라고 명령을 내려보십시오!"

당시 이들은 감히 제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이미 파괴공작을 통해, 중요설비를 모두 훼손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위험이 컸다. 노동자들을 잘 관리해야할 뿐아니라, 고용자 및 군대와도 협상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원만했다. 노동자들은 5일간 파업을 지속했고, 노동자구락부가 제출한 조건은 거의 모두 받아들여졌다.

이 공로는 아주 컸다.

당시의 중공 내부에서, 안원노광대파업은 아주 중요한 업적이었다.

이립삼은 주요책임자로서 지위가 급상승한다.

4) 1923년 2월 7일, 경한철로(京漢鐵路, 북경-무한)대파업이 군벌 오패부(吳佩孚)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사망한다.

2.7참안(慘案)후, 전국각지의 노동운동은 소강상태가 된다. 이때 안원노광의 이립삼은 무한구위서기(武漢區委書記)로 옮겨가서 더욱 광범위한 방면을 책임지게 된다.

그리고, 유소기는 안원노광의 주요책임자가 된다.

전국의 노동운동환경이 좋지 않을 때, 유소기는 억지로 공세를 펼치지 않고, 방어태세를 취하여, 갈등이 격화되지 않도록 한다.

"수세를 취하여, 노동자들에게 자만하지 말고, 함부로 움직이지 말도록 권하면서 내부를 단결하도록 힘쓰면서, 자본가들의 공격을 막았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가의 파괴공작에 대하여는 끝까지 싸우면서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이 방식은 오히려 안원노광의 노동운동을 아주 잘 이끌게 했다. 공인예당(工人禮堂)을 건립하여, 전국노동운동의 학습모범이 된다.

유소기는 귀국후 안원노광에서 2년여동안 있었고, 철저하게 자리를 잡는다.

이 일을 통해, 유소기는 노동운동지도자로 떠오르고, 순조롭게 중화전국총공회(中華全國總工會)에 진입하여 노동운동방면의 업무를 책임지기 시작한다.

이런 경력은 유소기에게 아주 견실한 기반을 마련해주고, 그의 당내에서의 지위를 굳혀주었다.

만일 의외의 일이 발생하지 않으면, 유소기는 노동운동방면의 대표인물이 될 터였고, 핵심지도층에 진입할 것이었다. 그러나 매번 의외의 일은 발생하는 법이다.

대혁명이 실패한 후, 짧은 무한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금방 왕정위(汪精衛)는 장개석(蔣介石)에 합류하여 함께 반공에 나선다.

왕정위가 배반한 시기에 유소기는 병을 안고 무한의 여러가지 긴급사무를 처리했다. 그리고 나서, 하룡(賀龍)의 안배에 따라 여산(廬山)으로 가서 요양한다.

그때, 유소기는 이미 당내에서 비교적 중요한 지도자였다.

다만 팔일(八一) 남창의거(南昌起義)때, 유소기는 여산에서 요양중이었고,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한다.

기실 많은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있는데, 팔일남창의거에는 아주 중요한 작용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때부터 백구당(白區黨)과 소구당(蘇區黨)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때부터, 당내에 두 갈래의 분업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도시에서는 노동운동등 비밀활동을 벌이고, 농촌에서는 무장혁명을 이끌어 혁명근거지를 건설하는 것이다.

팔일남창의거이후, 많은 지도자들은 군대를 이끌고 떠난다. 가장 전형적인 경우는 교원(모택동)이다. 일개서생에서 그는 군사지도자로 변신한다.

유소기는 그 시기에 병으로 치료중이었고, 여산에서 2달간 요양한 후 그에게 부여된 주요한 임무는 바로 백구당의 조직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후, 군사방면의 주요업무는 기본적으로 유소기와 인연이 없게 된다.

전쟁시기 가장 관건적인 것은 군사이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유소기의 존재감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군사방면의 존재감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혁명이 실패한 후, 백구의 당조직은 파괴될 것은 파괴되고, 마비될 것은 마비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순직성위(順直省委, 順天府와 直隸省, 즉 북경과 그 주변지역을 관장함)는 아주 특수했다.

비록 마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조직이 남아 있었다. 비록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정상적으로 운영되지는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부의 파벌이 너무 많았고, 매일 서로 싸웠으며, 상하관계도 완전히 혼란상태였기 때문이다.

순직(順直)은 바로 북경이다. 왜냐하면 북경이 예전에는 순천부였고, 하북은 이전에 직예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지방의 당조직을 순직성위라 부르는 것이다.

이제 알았을 것이다. 이 지방은 항일전쟁시기, 유소기가 다시 굴기한 핵심지역이다. 당시의 북방당의 업무는 주로 이곳에서 시작한다.

다만 당시 순직문제는 당내에서 가장 골치아픈 문제였다.

골치가 아프긴 해도 이 지방은 중요한 곳이었다. 누구든지 이곳을 맡는다면 그건 재수없는 일을 맡은 셈이 된다.

5) 처음에, 북방당의 업무는 주로 이대쇠(李大釗)가 책임졌고, 아주 잘해냈다. 십여개의 지위(地委)와 2개의 특별구위(特別區委)를 만들었으며, 당원도 수천명에 이른다.

그러나, 대혁명실패후, 장작림(張作霖)이 북경에서 이대쇠등 수십명의 핵심당원을 살해했다. 일거에 북방당조직의 중추가 붕괴되고, 군룡무수(群龍無首)가 되어 업무는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그후, 중앙에서는 순직성위를 만들어 이 난장판을 관장하려 했다.

팽술지(彭述之)가 서기였는데, 이 팽술지는 진독수와 업무스타일이 유사했다. 순직성위에서 일할 때, 가부장제의 방식이었고, 혼자서 모든 일을 결정했다.

순직성위의 당원들은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 팽술지를 낙마시킨 후, 순직의 동원들은 과오를 시정했고, 상급의 권위를 극도로 배척하는 분위기로 바뀌었으며, 극단적인 민주화의 길로 나아갔다.

이런 상황하에서 장정시기 이덕(李德)의 군사지휘권이 박탈되고나서, 당시 많은 사람들은 다시 군사적인 실수를 범할까 우려했고, 20여명의 군사위를 구성하여, 군사권을 분산시키며, 매번 군사명령을 내릴 때면 20여명의 투표로 결정했다.

순직쪽도 거의 비슷한상황이었다. 팽술지가 낙마한 후, 기본적으로 혼란상태였다.

순직내부에서는 아무도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들이박는 것이 일상사였고, 모두 "파관자파솔(破罐子破摔, 독이 깨졌으니 아예 부숴버린다. 즉 실수를 저지르고 그것을 시정하지 않고 더욱 나쁜 방향으로 나가도록 방치한다는 의미임)"의 태도였다.

팔칠회의(八七會議)후, 왕하파(王荷波)로 하여금 북방국서기를 맡아 이 문제를 해결하게 했다. 왕하파는 인수받은 후 먼저 조직개편을 한다. 주금당(朱錦堂)으로 하여금 순직성위서기를 맡게 했는데, 그는 임무를 맡자마자 2차례의 폭동을 일으켰다가 모두 실패하면서 많은 사람이 죽는다.

그렇게 되니 숙직성위의 많은 당원들은 강력하게 반발한다. 왕하파는 회의를 열어 왜 조직개편을 했는지 해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자, 한 반도의 밀고로, 왕하파와 회의에 참석한 10여명의 중요지도자들은 한명도 예외없이 체포되어 피살되었다.

간부를 배양하는 속도는 근본적으로 적에게 살해당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후, 채화삼(蔡和森)으로 바꾸어 이 일을 처리하게 했다. 채화삼은 당내의 원로였지만, 순직성위에 온 후에 쫓겨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부임한 후, 먼저 팽술지를 성위에서 제명하고 성위를 다시 개조했다.

그러나, 팽술지는 만만찮은 인물이었다. 그는 면직당하자 상해중앙으로 간 후에 고발한다. 중앙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채화삼을 불러 팽술지와 대질시킨다.


당시 중앙은 두리뭉실하게 수습하려 했다. 채화삼의 조직개편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얼마 후, 진독수가 하야한다. 팽술지의 뒷배경이 무너진 것이다.

중앙은 다시 채화삼의 조직개편이 옳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다보니 순직의 당조직은 혼란스러워지고, 일상업무는 마비상태에 빠진다.

바로 이런 상황하에서, 유소기가 이 엉망진창인 순직성위를 물려받는다. 그가 채화삼을 대체하여 순직성위로 간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유소기는 인수한 후에 거의 몰락할 뻔했다.

유소기는 전국충공회특파원의 신분으로 이 일을 처리했다. 그가 오자 순직성위의 몇 사람들은 그에게 질문한다: "듣기로 중앙에서는 순직성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정말 그러한가?"

또 어떤 사람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네가 북방에 온 것은 성위를 개조하려는 것인가?"

유소기도 골치아팠다. 그는 그저 지나간 일은 얘기하지 말자. 지금은 그저 해야할 일만 얘기하자고 대답한다.

그러나, 유소기의 직위는 일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중앙에 그에게 구체적으로 책임지는 직위를 달라고 요청하였지만, 중앙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앙에서는 순직문제가 아주 골치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부에 서서 처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처리할 수 없을 터였다.

유소기는 바깥에 서 있다보니 하마터면 끌려내려갈 뻔했다.

왕조문(王藻文)은 채화삼시기에 순직성위 서기가 되었다. 유소기가 오자, 왕조문은 바로 그에게 자신의 위세를 보인다. 회의에서 앞장서서 공격한다: 중앙에 자금을 달라고 했는데, 중앙에서는 순직성위의 경비를 내려보내지 않았다. 전혀 성의가 없다.

어떤 사람은 직설적으로 욕했다: "유지할 수 없다. 차라리 순직성위를 아예 해산시켜버리자!"

당시 당조직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다른 업무가 없었다. 일단 당에 들어오면 사회와 분리되고, 풀타임 당원이 된다. 그러니 활동경비가 당원들에게는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그래서, 왕조문은 경비를 요구한 것이다. 유소기는 아주 난감했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유소기를 그들을 다독이고 설득할 수 없었으며, 전체 업무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없었다.

바로 이 경력은 유소기로 하여금 깨닫게 만든다. 당원직업화, 당조직사회화의 사고방식이다. 우리가 지금 TV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어떤 가게주인이 실제로는 지하당원이었다는 장면은 바로 그의 이런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1928년 4월에 이르러, 제남참안(濟南慘案)이 발생했을 때, 유소기는 결심을 내리고 폭동계획을 내놓는다.

그가 계획을 내놓자, 즉시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다. 왜냐하면 순직성위는 당시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노동자 몇명을 동원할 수 있을 뿐이니, 폭동은 탁상공론이라는 것이다.

유소기도 전혀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무엇이었을까?

대변론(大辯論)이다.

모두가 불만을 가지고 있다면, 불만과 의견을 모두 토해내자. 어떤 등급의 당조직이건 모두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두 <출로(出路)> 기관지에 실어 공개적으로 토론하자.

다른 것을 몰라도, 이 방법은 그래도 비교적 괜찮았다. 왜냐하면 최소한 일정한 정도로 컨센서스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직성위의 업무는 해결되지 않았다. 중간에 한때는 중단된다. 성위의 업무는 철저히 중단된다. 최종적으로 결국 주은래(周恩來)가 나서서 해결해야 했다.

6대가 끝난 후, 주은래는 순직에 6대정신을 전달한다. 그러면서 순직문제를 해결한다. 이번 확대회의에서, 주은래가 결론을 내려준다. 그리하여 순직성위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명확해진다.

이렇게 하여 순직문제는 초보적으로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6) 유소기가 일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모두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러나, 곡절이 없으면 사람은 성장하기 어렵다. 가장 관건적인 것은 사람이 어떤 일을 겪지 않으면, 그 실질을 자세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시간이 오래 되었다고 하여 사람의 마음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일을 만나야 비로소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교원은 유소기를 자신의 파트너로 삼는다. 아주 중요한 지방에서 그들 두 사람의 주장과 생각은 모두 아주 잘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교원이 지도자에 오른 후, 그는 자신을 도와줄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를 도와 각 방면의 사무를 처리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유소기는 바로 백구당을 대표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유소기가 백구당의 대표가 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바로 그의 사상이 교원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의 검증을 거쳤다.

문제의 관건은 반드시 시험을 받을 기회가 부여되어야 하고, 다음으로 그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그때, 공산당원에 대한 최대의 시험은 바로 코민테른(공산국제)의 지휘봉 아래에서, 정확한 관념을 견지해야 했다. 타격을 받은 후에도 자신의 주장을 견지할 수 있어야 했다.

금방 운명은 유소기에게 하나의 기회를 부여한다.

1929년 여름, 유소기는 중앙에서 파견하여, 심양(瀋陽)으로 간다. 그리고 만주성위서기(滿州省委書記)가 된다. 이때 중앙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이립삼이었고, 그들 둘은 함께 안원노광에서 일한 바 있었다.

이를 보면 이 지방이 그를 훈련시키기에 아주 괜찮은 곳이었다.

유소기를 동북에 배치한 연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엉망진창인 국면을 수습해본 경험이 있었다.

팔칠긴급회의이후, 중앙은 진위인(陳爲人)을 파견하여 동북에 중공 만주성위를 건립한다. 진위인은 아주 능력있는 인물이었고, 동북에서 조직을 잘 발전시켰다. 그러나 동북의 적들은 너무나 흉악했다.

대혁명이 실패한 후, 이대쇠가 피살되고, 하르빈, 대련, 봉천, 장춘, 길림등지의 당조직도 기본적으로 파괴되었으며, 주요지도자와 당원들도 체포되었다.

진위인이 동북으로 간 후 기본적으로 조직을 재건하고, 연속하여 3기동안 서기를 맡는다.

그러나, 장작림은 너무 악독했다. 일본제국주의와 협력하여 동북에서 공산당원을 체포하고, 많은 특무를 두어 사방에서 혁명당원들을 붙잡아 들인다.

1928년말, 만주성위는 심양의 대동변문(大東邊門) 밖의 한 노동자집에서 회의를 거행하고 있었다. 이번 회의는 성위확대회의로 각 방면의 주요지도자들이 모두 모였다.

그런데, 이번 회의에서 다시 반도가 생기고, 적들에 의해 일망타진당한다. 겨우 단성위서기(團省委書記) 장임광(張任光)만이 도망칠 수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체포당한다.

사건발생후, 사각재(謝覺哉)는 중앙특파원으로 동북을 순시하고 있었고, 중앙에 보고서를 올린다. 동북은 아주 괜찮은 곳이며, 발전전망이 좋다고. 다만 우리 당의 영향력이 너무 적어서, 강력한 인물이 와서 이끌어 개척해야할 것이라고 했다.

중앙은 동북의 환경이 너무 잔혹한 것을 보고, 거의 포기할 뻔했다. 그래서 너무 많은 역량을 투입하지는 않으려 했다. 그러나 사각재의 분석보고서를 본 후에 동북의 당조직을 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고르고 고르다가, 유소기를 보낸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소기는 동북으로 가서 업무를 이끈지 얼마 되기도 전에, 봉천사창(奉天紗廠)의 파업을 이끌게 되었게, 파업선동자로 체포당한다.

이 사건은 나중에 유소기가 공격당하는 빌미가 된다. 어떤 사람은 유소기가 감옥에서 기밀을 누설했고, 적과 거래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풀려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명히 중간에 어떤 비밀이 있다고 보고, 그를 매국노, 반도라고 몰아부치는 것이다.


만일 유소기같은 사람을 매국노라고 부른다면 그건 코미디일 것이다.

실제로, 당시 유소기가 감옥에서 풀려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는 체포된 후, 자신은 동북에 장사를 하기위해 왔다고 진술한다. 그리고 당시 유소기가 동북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공산당원들을 지목하는 배신한 당원도 유소기를 전혀 알지 못했다.

경찰은 증거도 없고, 물증도 없으니, 결국 지방법원으로 보내 처리하게 했고, 사건은 그렇게 흐지부지된 것이다.

유소기가 체포되었을 때, 상황은 비교적 위급했다. 만일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한편으로 그를 구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임시성위를 구성한다.

그 결과 유소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된 것이다.

7) 중동로사건(中東路事件, 만주철도를 둘러싸고 소련과 장작림이 충돌한 사건)이후, 소련은 이 일을 마음에 담아 두었고, 중공에 압력을 가한다. 중공은 다시 유소기에게 압력을 가한다.

중앙의 뜻은 영향력을 키워 사건을 일으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련을 옹호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여, 구호를 외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동북은 군경이 사람을 마구잡이로 잡아죽였다. 그렇게 소동을 벌이게 되면 큰 사건으로 번질터였다. 하물며 소련을 옹호한다는 구호를 외치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중동로사건에서 유소기처럼 소련에서 유학했던 사람들은 코민테른의 입장에 완전히 서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고집했고, 실제에 부합하도록 일처리를 했다.

사후에 경험을 종합할 때, 유소기는 직접적으로 코민테른을 공격한다:

"코민테른은 중국대혁명때 잘못을 범했다. 바로 당내기회주의잘못에 대해 반대하는 것을 무시했고, 이론적으로, 사상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기회주의지도자를 청산하고 처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중국대혁명이 실패한데는 코민테른에 책임이 있다. 중동로노동자투쟁에서도 당내기회주의의 투쟁문제를 무시한 점이 존재했다."

확실히 유소기의 입장은 중국혁명에 서 있었고, 코민테른에 서 있지 않았다.

정치는 입장을 보고, 경제는 시장을 본다.

유소기가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후, 즉시 중앙에 의해 만주를 떠난다. 유소기가 상해애 도착하자, 정치국의 동지들이 명백하게 그에게 말해준다: 네가 불려온 것은 바로 만주의 일을 망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질책한다: "너의 잘못을 죽어도 싸다. 너는 정치적으로 엉망진창이다! 너는 만주의 당을 없애버렸다. 너는 곤장오백대를 맞아야 한다!"

동북에서 돌아온 후, 유소기는 다시 노동자운동으로 배치된다. 다만 이때의 노동운동은 이미 별로 발전할 공간이 없었다. 백구에서 심지어 당조직조차도 활동을 정상적으로 진행할 수 없었는데, 노동운동은 더 말할 여지도 없다.

그래서 이때의 노동운동은 이전처처럼 손쉽게 실적을 낼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손쉽게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후 유소기는 중국공회대표단의 단장이라는 명목으로 모스크바에 간다.

그때 장국도(張國濤)도 모스크바에 있었다. 그는 남창의거를 전후하여 잘못을 범했기 때문에 모스크바로 불려가 학습, 반성중이었다.

모스크바에 있을 때, 장국도는 상대적으로 비교적 겸손했고, 예전처럼 공격성이 없었다.

유소기는 달랐다. 공격력이 충분했다. 프로핀테른(적색노동조합국제, RILU)에서 중국대표로 일할 때, 유소기는 RILU 지도자와 다른 견해를 많이 발표했었다.

당시 RILU에서 결정한 많은 정책들은 고정된 틀로 다른 지부들이 무조건적으로 따르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유소기가 가장 먼저 반발한다. 그는 모든 국가는 상황이 다르므로 당연히 서로 다른 정책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당시 노동운동은 비교적 곤란했고, 정상활동마저도 어려웠다. 그러므로 프로핀테른에서 결정한 내용을 집행할 수가 없었다.

쌍방간에 여러차례에 걸친 논쟁이 있었지만, 프로핀테르는 유소기를 설득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정책추진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유소기를 다시 중국으로 돌려보낸다.

1931년 가을, 유소기는 모스크바에서 귀국한다.

확실히 유소기가 이번에 돌아오자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나중의 교원과 마찬가지로, 사람들마나 경원하는 인물이 된다.

1931년초, 제6기 제4중전회가 개최되고, 왕명(王明)이 무대의 중심에 올라온다. 이를 전후하여 박고, 장문천(張聞天)등도 차례로 귀국하여 구추백(瞿秋白)에 대한 비판투쟁에 가담한다.

이때 모스크바에서 귀국한 유소기는 자연스럽게, 박고, 장문천, 강생(康生)등의 비판투쟁대상이 된다.

그가 책임지고 있던 노동운동방면에서, 여러가지 잘못이 지적당한다. 유소기의 백구업무에 대한 지적은 기본적으로 교원이 소비에트구에서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과 판박이였다.

박고등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은 후,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유소기는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박고는 강생과 함께 유소기를 대거 비판한다.

강생은 원래 비판대상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이 이립삼에 대한 확고한 지지자였고, 왕명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후 돌아서서, 전력을 다해 이립삼을 공격하고, 이를 통해 왕명으로부터 인정받는다. 그리고 지도층에서 확실하게 자리잡는다.

지적에 대해 유소기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무장폭동을 일으켜야 하고, 지부에 준비하라고 통지한다."

"문제는 주관적으로 무슨 역량을 가지고 폭동을 일으키냐는 것이다. 나는 동지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 있을지 물어보았다. 그들은 4,50명정도라고 말했다. 나는 말했다. 그걸로는 십장 한명도 몰아낼 수 없다. 하물며 제국주의, 국민당을 어떻게 몰아낸단 말이냐!"

박고등이 당시에 원한 것은 진상이 아니었다. 그저 각방면의 통제권을 쟁탈하는 것이었다.

유소기는 그들에 의해 모두 잘못이라고 비난받는다. 그후 그는 중앙소비에트구로 보내어져 노동운동에 참여하게 한다. 기본적으로 주변인물중에서도 주변인물로 밀려난 것이다.

8) 얼마 후, 상해의 백색공포는 너무나 심각했고, 박고등도 임시중앙을 중앙소비에트구로 옮겨야 했다.

중앙소비에트구로 온 후에 비판투쟁대상은 교원(모택동)으로 바뀐다.

그후에 임필시를 배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박고와 장문천 간에도 다툼이 일어난다.

제2대 소련유학파들이 득세한 후, 유소기, 임필시같은 제1대 소련유학파들과 단결하지도 못했고, 그들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있었다. 이는 그들의 정치경험이 매우 부족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들이 전면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일련의 비정상적인 조직행위때문이었다. 그들 자신은 무슨 경력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올라가는 것도 빠르지만, 내려가는 것도 빠른 법이다.

유소기는 장정(長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가 장정시기에 따라간 부대는 주력부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모습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다.

장정이 시작된 후, 유소기는 중앙대표의 신분으로 홍팔군단(紅八軍團)을 따라 진행한다. 이 부대는 약 7천여명이 있었고, 대다수는 중앙소비에트구에서 후기에 입대한 신병들이었다. 전투력도 비교적 약했고, 일반적으로 후방업무를 담당했다.

나영환(羅榮桓)이 이 군의 정치부주임이었다.

준의회의(遵義會議)후, 유소기는 홍3군단(紅三軍團)으로 가서 정치부주임이 된다. 그때 약간의 군사경험을 쌓았다고 볼 수 있겠다. 당시 홍8군단은 상강전역(湘江戰役)후에 이미 전멸했고, 건제(建制)도 취소되었다.

다만, 유소기가 다시 굴기할 기회는 와교보회의(瓦窖堡會議)후에 찾아온다.

그때, 전국형세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중국과 일본의 민족갈등이 점차 주요모순으로 되고, 백구의 공작은 확대공간이 생긴다. 그러나 당시의 백구당조직은 기본적으로 모두 마비되었다.

몇 차례의 회의를 거친 후, 교원은 유소기의 백구공작에 대한 사상이 자신의 사상노선과 매우 부합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두 사람은 많은 면에서 생각이 같았다.

관문주의에 반대하고, 모험주의에 반대하는 점에서 두 사람의 의견은 고도로 일치한다.

그리고, 유소기는 교원의 독립자주적인 유격전 전략을 받아들이고, 가장 광범위한 반일민족통일전선을 건립해야 한다는 점도 깊이있게 이해했다.

교원은 주변을 살펴보고난 후, 유소기를 제외하고 진정 자신의 전략적 의도를 이해하며, 백구공작을 잘 아는 인재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의문의 여지없이, 백구당조직을 재건하는 업무는 유소기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유소기가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교원은 안원노광의 만명노동자파업임무를 유소기에게 부여했다.

십여년후, 역사는 다시 한번 유소기를 선택했다. 화북의 1억이 넘는 인민의 항일이라는 어려운 임무가 다시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1936년초, 유소기는 호복(胡服)이라는 가명으로 중앙이 그에게 부여한 임무를 떠맡는다.

섬북(陝北)에서 출발하여, 화북(華北)으로 간다. 일찌가 자신을 골치아프게 만들었던 "순직"으로 가서 중앙이 그에게 부여한 새로운 임무를 수행한다.

당시 정치보위국에서 일한 왕수도(王首道)에 따르면, 유소기가 출발할 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한 동지가 유소기에게 말했다: "당신이 이번에 백구로 가는 것은 호랑이굴로 돌아가는 것이다. 임무가 크고 어렵다!"

유소기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한다: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어찌 호랑이새끼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비범한 공을 세우려면 비범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금일필마술연지(今日匹馬戌燕地), 타일필유고위이대지(他日必有高位以待之)

(오늘 말을 타고 연의 당을 지키면, 언젠가 높은 자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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