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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의(費禕): 살아서는 중류지주(中流砥柱), 죽어서는 천고미단(千古謎團) 글: 역사기실정유취(歷史其實挺有趣)                                             지주산(砥柱山) : 중류지주(中流砥柱)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연희16년(253년), 정월 초하루, 삼국 촉한의 대장군부(大將軍府)는 화려한 등과 오색 띠가 걸렸다. 대장군부의 주인은 당연히 대장군 비의(費禕)였다. 비의는 오늘 매우 기뻤다. 촉한조정이 그로 하여금 한수(漢壽)로 나가 지키도록 허락했고, 그의 개부(開府)를 허가했다. 확실히 조정은 그를 중점적으로 배양하고자 하였으며, 아마도 자신이 이후 승상의 자리를 맡을 터였다. 그래서 이 날, 각지의 촉한관리들중 비의와 약간의 교분이 있는 사람은 모두 대장군부로 가서 축하했다. 모두 잔을 들고 음식을 먹으며 술을 마셨다. 가무소리가 은은하게 들렸고, 촛불은 흔들렸으며, 분위기는 최고조로 끌어오른다. 술잔이 3배 돌고나서, 곽수(郭脩)라는 촉한장령이 앞으로 나와 술잔을 권했다. 곽수는 좌장군(左將軍)이고, 평소에 비의와 관계가 좋았다. 당연히 비의는 비교적 관대한 사람이어서 어떤 사람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비의와 같은 시기에 살던 사람 그리고 후세의 사람들이 그에 대해 내린 평가는 호평 일색이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손권(孫權): 그는 천하의 숙덕(淑德)이며, 반드시 촉의 고굉(股肱)이 될 것이다(<삼국지.권44>) 사마광(司馬光): 비의는 성격이 겸손하고 소박하며, 나라의 공명으로는 장완(蔣琬)에 비견할 만하다(<자치통감.권75)> 또 하나 살펴볼만한 문구는 다음과 같다: <삼국지.권43)>: "의초견비의위대장군(嶷初見費禕爲大將軍), 자성범애(恣性汎愛)...." 무슨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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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소기(劉少奇)는 어떻게 중공의 2인자에 오를 수 있었을까? 글: 궁행객(躬行客) 왜 유소기였을까? 연안정풍(延安整風)이후 형성된 영도그룹의 2인자는 왜 유소기였을까? 2인자라는 말은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고, 실질적인 근거가 있다. 1943년 3월, 연안에서 개최된 정치국회의에서, 임필시(任弼時)가 초안한 <중앙기구조정 및 정간(精簡)에 관한 결정>이 통과되었고, 이 결정의 가장 큰 의미는 정치국, 서기처 및 그 산하기구의 직책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호교목(胡喬木)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강생(康生)은 회의에서 이 기구조정의 협의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소기(少奇)동지의 의견에 따르면, 서기처(書記處)에는 주석을 1명두고, 나머지 2명의 서기는 주석의 조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연석회의의 형식으로 일상업무를 처리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후 회의선거를 거쳐, 3명의 서기처 서기, 교원(敎員, 모택동의 별칭), 유소기, 임필시를 선출한다. 교원의 제안에 따라, 유소기는 군사위업무에 참가하고 부주석중 1명이 된다. 그외에, 2개의 정치국과 서기처를 보조하는 조력기관을 둔다. 하나는 선전위원회, 다른 하나는 조직위원회이다. 선전위원회의 구성원은 교원, 왕가상(王稼祥), 박고(博古), 개풍(凱豊)의 4명이고, 교원이 서기, 왕가상이 부서기를 맡는다. 실제업무에서 이 위원회의 주요업무는 왕가상이 책임졌다. 왜냐하면 교원은 전체국면을 영도하는 업무를 하여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때문이다. 또 다른 조직인 조직위원회는 8명으로 구성되었따. 유소기, 왕가상, 강생, 진운(陳雲), 장문천(張聞天), 등발(鄧發), 양상곤(楊尙昆), 임필시. 유소기가 서기를 맡는다. 당시 선전과 조직 두 방면의 보면, 정풍기간동안 가장 핵심적인 선전업무는 교원이 주관하고, 조직방면의 업무는 유소기가 주관했다. 이 의미는 아주 분명하다. 화북, 화중의 관건적인 순간에 교원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전보를 보내, 유소기를 연안으로 ...

진독수(陳獨秀)는 왜 모스크바의 초청을 5번이나 거절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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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독수(陳獨秀)는 왜 모스크바의 초청을 5번이나 거절했을까?                                              천두슈 (陳獨秀)  - 위키백과 글: 왕우군(王友群) 중국공산당과 모스크바의 연원은 102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1년 당시의 러시아공산당(이후 소련공산당으로 명칭을 바꿈)이 장악하고 있던 코민테른(공산국제)은 러시아공산당의 이익을 위해, 대표를 상해로 파견하여 반드시 러시아공산당의 지시를 듣는 중국공산당을 성립시키고자 한다. 진독수는 중공의 초대 당수(黨魁)로 1921년 중공1대부터 1927년 중공5대까지, 진독수가 중공의 당수를 맡았다. 1927년에 이르러, 코민테른의 극동지부로서 중국공산당이 이끈 '대혁명'이 실패로 끝난다. 중공당수 진독수는 일거에 중시지적(衆矢之的: 뭇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된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코민테른은 거듭하여 진독수에게 모스크바로 올 것을 요구하였지만, 진독수는 모두 거절했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진독수는 5차례 모스크바의 초청을 거절하다. 1927년 7월 8일, 코민테른은 중공중앙에 전보를 보내, 중국혁명이 실패하였는데, 그 원인은 '중공지도자가 범한 일련의 가장 엄중한 과오때문'이라고 하면서, '여러가지 방법을 취하여 중공중앙의 기회주의적 과오를 시정하고, 정치적으로 당의 지도기구를 건전하게 만들라'고 요구한다. 이에 따라, 중공중앙은 조직개편을 실시하여, 장국도(張國濤), 장태뢰(張太雷), 이입삼(李立三), 이유한(李維漢), 주은래(周恩來)로 임시중앙상임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때부터 진독수는 정직된다. 당시, 코민테른의 주중국대표인 미하일 보로딘(鮑羅廷)은 진독수에게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과 중국혁명문제를 포론할 것을 요구했으니, ...

문강(文强): 모택동의 사촌동생은 왜 국민당의 특무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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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강(文强): 모택동의 사촌동생은 왜 국민당의 특무가 되었는가? 글: 유혜빙(游慧冰) 모택동의 사촌동생인 문강(文强)은 전설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일찌기 중국공산당의 중요간부였고, 북벌전쟁, 8.1남창의거에도 참가했으며, 사천성위상위 겸 군위서기, 천동특위서기를 맡았었다. 나중에 공산당을 떠나 국민당 '군통'의 특무와 '국군'의 장교가 되어 회해전투에 참가했을 때 인민해방군에 포로로 잡혀, 감옥에서 26년간 지내다가 1975년에 비로소 특사를 받아 석방된다. 출옥후에 문강은 제6기, 네7기 전국정협위원, 민혁중앙 감찰위원, 황포군관학교 동문회이사등의 직위를 지낸다. 그는 광범위한 인맥을 이용하여 해협양안의 교류업무를 전개했고,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해 공헌했다. 그는 등소평을 존경하여, "나는 <등소평주의>라는 책을 한권 쓰겠다"고까지 한다. 아쉽게도 그가 글을 쓰기시작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다. 23개현을 관할한 중공의 고위간부 문강은 1907년 호남 장사 서록(지금의 망성현 금량향)의 한 지주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 전해지는 바로는 문천상(文天祥)의 23대손이라고 한다. 부친 문진지(文振之)는 일찌감치 일본에 유학했고, 신해혁명을 전후하여 손중산(孙中山), 황흥(黄兴), 채악(蔡锷)등과 모두 교류가 있었다. 고모인 문칠매(文七妹)가 바로 모택동의 모친이다. 문강은 어려서부터 모택동을 "모대가(毛大哥)"라고 불렀고, 모택동의 동생인 모택담(毛泽覃)과는 학교를 같이 다녔고, 사이가 아주 좋았다. 모택동은 문강보다 14살이 많았으며, 문강과 농담을 즐겼다. 문강은 성격이 고집있고, 자주 모택동과 논쟁을 벌였다. 문강은 나중에 구술한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택동이 처음 나를 알았을 때, 나는 그와 말장난을 했다. 나중에 내가 그에게 말장난을 한 적이 여러번이었고, 끝까지 그러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점은 소년 문강은 모택동, 하희(夏曦)등에게서...

민국(民國)시대 가장 권위있는 10명의 국학대사(國學大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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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국(民國)시대 가장 권위있는 10명의 국학대사(國學大師) 글: 방유(方維) 민국시기는 중국문화사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대사(大師)들이 많이 배출되었을 뿐아니라, 개성도 충만했다. 그리하여 춘추전국과 위진남북조의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1. 장태염(章太炎) 1929년, 상해 <시보>는 <문단점장록(文壇點將錄)>을 발행했다. <수호전>에서 108명의 영웅호한을 정한 형식을 모방하여당시 문화계의 대사들의 서열을 매긴 바 있는데, 1위로 선정된 사람이 바로 장태염이었다. 청화대학 국학원이 성립될 때, 가장 먼저 확정된 교수 명단에는 단지 3명이 있었다: 장태염, 양계초(梁啓超), 왕국유(王國維). 그러나, 장태염은 고사하고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뒤의 두 사람은 그와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찌기 양계초에 대하여는 "만일 양계초 같은 무리라면, 역사에 한 글자라도 들어갈 수 있으랴?"라고 말한 바 있고, 왕국유에 대하여는 멸시하면서 "부유(腐儒)"라고 불렀다. 기실 대사들은 각자 자신의 장점이 있는데, 장태염은 스스로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자신의 국학이 대단하다고 여겨서, 양계초와 왕국유 두 사람을 그렇게 낮춰 평가했던 것이다. 2. 양계초(梁啓超) 양계초는 청화대학 국학원의 "사대도사(四大導師)"중 으뜸이다. "중화민족"이라는 단어도 그가 처음 꺼낸 것이다. 그의 일생은 고대 독서인의 "나아가면 천하를 도모하고, 물러나면 책을 써서 자신의 학설을 세운다"는 궁극적인 경지에 부합하였다고 할 수 있다. 3. 왕국유(王國維) 왕국유는 중국근대역사상 최후의 미학가이며 문화사상가로 불린다. 양계초는 그를 이렇게 높이 평가했다: "중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세계를 위한 학인이다." 4. 진인각(陳寅恪) 진인각은 "교수의 교수", "대사의 대사"로 불리는 인물이다...

민국재녀(民國才女) 능숙화(凌叔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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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국재녀(民國才女) 능숙화(凌叔華) 민국(民國)시대 가장 권위있는 10명의 국학대사(國學大師) 글: 천성묵객(釺城墨客) 그녀는 민국 문단(文壇)의 가장 눈에 띄는 재녀중 한 명이다. 타고르도 그녀에게 탄목했고, 서지마(徐志摩)도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었다. 그러나, 그는 열렬하게 그녀를 추구했던 서지마를 거절하고, 온건한 문학가와 결혼한다. 다만, 그후에 바람을 피워 남편에게 발각된다. 그녀는 잘못을 인정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가장 무정한 방식으로 보복하여 남편의 일생을 망친다. 그녀는 도대체 누구인가? 천지교녀(天之驕女) 민국은 재자가인(才子佳人)을 배출한 시대이고, 능숙화는 바로 그 중의 한명이다. 1900년, 능숙화는 북경의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난다. 부친 능홍훈(凌鴻勛)은 일찌기 청나라조정의 고관이었고, 모친도 선비집안출신이다. 능씨집안은 딸을 위하여 화안(畵案)을 개설하고, 피아노를 구매하고, 심지어 과외선생을 불러서 그녀에게 영문경전을 가르쳤다. 능숙화는 3살때 글을 읽고, 5살때 대자(對子)를 만들 수 있었으며, 8살때 모친을 따라 자수를 배울 때, 몰래 자수로 시를 수놓았다. 그녀는 성격이 매우 강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숙녀"라는 틀 속에 갇히기를 원치 않았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명문천금 중에서 이류(異類)이다". 그녀가 이류이기 때문에 그녀는 나중에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일생을 보내게 된다. 1919년, 그녀는 연경대학(燕京大學)에 입학했고, 여기에서, 능숙화는 진정으로 스스로의 재능을 맘껏 펼친다. 그녀는 문학을 배웠고, 미술을 배웠다; 그녀는 소설을 쓰고, 유화를 그렸다; 그녀는 치파오를 입고 시를 읊었으며, 그림전시회를 열면서 사람들과 대담을 나누었다. 그녀는 같은 학교를 다니던 빙심(氷心)과 등영초(鄧潁超)가 있었으며, 한명은 온완세니(溫婉細膩)로 유명했고, 또 한명은 격앙과감(激昻果敢)으로 유명했다. 능숙화는 이들 두 사람을 합친 것같았다. 글은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