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국재녀(民國才女) 능숙화(凌叔華)

 민국재녀(民國才女) 능숙화(凌叔華)

민국(民國)시대 가장 권위있는 10명의 국학대사(國學大師)

글: 천성묵객(釺城墨客)

그녀는 민국 문단(文壇)의 가장 눈에 띄는 재녀중 한 명이다. 타고르도 그녀에게 탄목했고, 서지마(徐志摩)도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었다.

그러나, 그는 열렬하게 그녀를 추구했던 서지마를 거절하고, 온건한 문학가와 결혼한다. 다만, 그후에 바람을 피워 남편에게 발각된다.

그녀는 잘못을 인정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가장 무정한 방식으로 보복하여 남편의 일생을 망친다. 그녀는 도대체 누구인가?

천지교녀(天之驕女)

민국은 재자가인(才子佳人)을 배출한 시대이고, 능숙화는 바로 그 중의 한명이다.

1900년, 능숙화는 북경의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난다. 부친 능홍훈(凌鴻勛)은 일찌기 청나라조정의 고관이었고, 모친도 선비집안출신이다.

능씨집안은 딸을 위하여 화안(畵案)을 개설하고, 피아노를 구매하고, 심지어 과외선생을 불러서 그녀에게 영문경전을 가르쳤다.

능숙화는 3살때 글을 읽고, 5살때 대자(對子)를 만들 수 있었으며, 8살때 모친을 따라 자수를 배울 때, 몰래 자수로 시를 수놓았다.

그녀는 성격이 매우 강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숙녀"라는 틀 속에 갇히기를 원치 않았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명문천금 중에서 이류(異類)이다". 그녀가 이류이기 때문에 그녀는 나중에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일생을 보내게 된다.

1919년, 그녀는 연경대학(燕京大學)에 입학했고, 여기에서, 능숙화는 진정으로 스스로의 재능을 맘껏 펼친다.

그녀는 문학을 배웠고, 미술을 배웠다; 그녀는 소설을 쓰고, 유화를 그렸다; 그녀는 치파오를 입고 시를 읊었으며, 그림전시회를 열면서 사람들과 대담을 나누었다.

그녀는 같은 학교를 다니던 빙심(氷心)과 등영초(鄧潁超)가 있었으며, 한명은 온완세니(溫婉細膩)로 유명했고, 또 한명은 격앙과감(激昻果敢)으로 유명했다.

능숙화는 이들 두 사람을 합친 것같았다. 글은 아주 세심했고, 기질은 날카로웠다.

세 사람을 합쳐서 "연대삼재녀(燕大三才子)"로 나란히 불리며, 일시에 명성을 떨친다.

연경대학을 다니는 동안 능숙화는 "소저(小姐)의 대서방(大書房)"의 여주인으로 불렸다.

소위 "소저의 대서방"은 그녀가 자신의 저택에 설립한 문화살롱이고, 국외의 문화계 명사들을 불러 정기적으로 모여 시와 예술을 논했다.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은 시인묵객만이 아니라, 그 당시 중국에 왔던 서방학자, 예술가와 외교관도 있었다.

그녀는 유창한 영어로 외국작가들과 문학유파를 토론하고, 또 아주 예쁜 해서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중서문화의 사이를 오가는 여문호(女文豪)의 모습이었다.

1924년, 인도의 대문호 타고르가 중국을 방문한 기간동안, "소저의 대서방"을 방문한 바 있다.

'동방성자'라 불리던 시인은 능숙화를 만났을 때, 한참을 쳐다보고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동방의 캐서린 맨스필드이다"

맨스필드는 19세기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소설가이고, 세밀한 필치로 여성의 감정을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평가가 타고르의 입에서 나오다니, 마치 성지를 내린 것처럼 당시의 문단에서 능숙화를 괄목상대하게 된다.

타고르가 그녀를 칭찬하는 것과 동시에 또 다른 두 명의 민국재자(民國才子) 서지마(徐志摩)와 진서형(陳西瀅)이 그녀에게 빠진다.

서지마는 낭만주의로 유명한 '비양시인(飛揚詩人)'이고, 능숙화를 만난 후 첫눈에 반한다.

그는 자주 '소저의 대서방'에 드나들면서, 그녀를 위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보내고, 심지어 스스로 나서서 그녀의 작품에 서문을 써준다.

능숙화는 서지마의 재능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높이 평가했으나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는 않았다.

서지마가 열렬했던 것과 비교하여, 진서형의 태도는 훨씬 함축적이었다.

진서형은 북대재자(北大才子)이고, 문자는 냉정청명(冷靜淸明)했다. 사람도 그 글과 같아서 그는 자주 그녀의 소설에 주석을 달아주기도 하고, 또한 자주 그녀를 학교에서 조직한 문예강좌에 초청했다.

한번은 강좌가 끝난 후, 그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 준다. 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묵묵히 헤어졌다.

그날 이후, 능숙화는 적극적으로 답신을 보내기 시작한다. 1통 다시 1통, 그녀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너는 말이 적어서 내가 안정된다; 너는 낭만적이지 않아서, 내가 편안하다."

이것이 아마도 그녀가 진서형을 택하고, 서지마를 택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정장풍운(情場風雲)

1927년 가을, 능숙화는 우아한 치파오를 입고 결혼식장에 들어선다. 그녀의 곁에는 바로 그 온문이아(溫文爾雅)한 진서형이 서 있었다

그들의 결합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문단가우(文壇佳偶)"라고 불렀다. 한명은 중국과 서방에 이름을 떨친 재녀이고, 다른 한명은 북대의 저명한 문학평론가이다.

결혼초기 그들은 같은 책상을 쓰면서, 아침에는 그가 그녀를 위해 먹을 갈아주고, 그녀는 그를 위해 차를 따라주었다.

그들은 셰익스피어를 토론하며 번역했고, 위고와 토스토예프스키의 문풍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저녁이 되면, 그녀는 항상 소매없는 겉옷을 걸치고 그의 강의를 들으러 갔고, 그는 강의가 끝날 때면 가장 먼저 그녀를 찾았다.

그때, 문단은 그들을 "학술반려중 모범"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런 "모범"은 그다지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능숙화는 발견하게 된다. 소위 "정신공명(精神共鳴)"은 그녀의 마음 속에서 갈수록 분명해지는 고독을 채워주지 못했다.

진서형은 엄격하고, 냉정한 남자이다. 그는 이성을 숭상했다. 설사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드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쨌든 감정적인 교류를 갈망하는 여인이었다.

1935년, 능숙화는 중영문화교류의 대표로 대표단을 이끌고 런던으로 간다.

한 문학좌담회에서 그녀는 영국시인 줄리언 벨을 만난다. 그는 나이 27살의 청년시인이었다.

줄리안 벨은 캠브리지의 명문집안출신으로 자유주의사상이 농후했으며, 그는 중국문학을 사랑했고, 동방여성에 대해 흥미가 컸다.

치파오를 입고, 말을 잘하며, 행동거지가 독립적인 능숙화를 보자 첫눈에 반한다.

능숙화도 그의 영국신사기질과 반역기질에 이끌리게 된다.

줄리안 벨은 오후에 그녀를 위해 시를 읊고, 저녁에 그에게 뜨거운 차를 건네주었으며, 그다지 숙달되지 않은 중국어로 그녀를 "Shuhua"라고 불렀다.

런던에서 지내는 동안, 그들은 테임즈강가를 유람하고, 대영박물관을 참관하고, 소호지구의 작은 바에서 낮은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 시를 쓰고, 그녀는 그를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 속에 오랫동안 쌓여 있던 "소녀심"에 새로 불이 붙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사랑은 신속하고 열렬했다. 당시 많은 일행들도 그들의 관계를 알아차렸고, 그녀에게 절제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한 마디로 대답한다: "일생에서 얻기 힘든 한번의 두근거림이다. 나는 그것을 저버리고 싶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가무지도 않았고, 귀국한 후에서 연락을 유지했다.

처음에는 진서형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학술교류로 알았다. 다만 그녀가 자주 늦게 귀가하는 일이 잦아지고, 감정기복이 심해지게 된 후에 점차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어느 날 밤, 진서형이 서재의 문을 열었고, 능숙화가 줄리안과 창에 기대어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게 된다. 피차간에 애정을 가득 담은 채로.

공기는 잠시 응고되었다. 능숙화는 당황하지도 않고, 변명하지도 않았다. 단지 서서히 몸을 둘려 원래의 자리에 섰고, 태도는 담담했다.

그날 이후, 외도사건은 북경의 문인사회내에서 소문이 난다. 능숙화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풍파이후, 그녀는 계속하여 줄리안벨의 곁에 남아 있을 수가 없게 된다.

잘못을 인정하고 집으로 돌아오다(認錯歸嫁)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외도사건이후, 능숙화는 꼬박 한달간 조용히 지낸다.

그녀는 집밖으로 나가지도 않았고, 글을 쓰지도 않았으며 ,그저 매일 창앞에 앉아서, 북경의 겨울나무들의 쓸쓸한 모양을 지켜보았다.

진서형은 거처에서 이사를 나갔고, 어린 딸과 함께 잠시 친척집에 머문다. 그는 깔끔한 글씨체로 쓴 편지를 한통 남긴다:

"만일 네가 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원하면, 일체의 옛생각을 끊어야 한다; 만일 끝까지 나가기로 결정한다면 속히 이 혼인을 끝내고, 각자 따로 살기로 하자."

이 서신을 능숙화는 수십번 반복해서 읽는다. 결국 그녀는 그 편지를 접고는 조용히 선택한다: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때문은 아니었고, 딸을 걱정해서였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시대에는 이혼한 여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고, 그 편견은 자신에게만 닥치는 것이 아니라, 딸의 미래에도 깊은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딸이 여론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날 그녀는 익숙한 정원을 걸어들어갔고, 진서형은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도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잠시 침묵하고 나서 한 마디 한다: "집에서 네가 살고 싶은 방을 골라서 지내라!"

그날 이후, 그들은 다시는 같은 방을 쓰지 않는다. 낮에는 두 사람이 각자 드나들고 서로를 간섭하지 않았으며, 밤에 그는 서재에서 글을 썼고, 그녀는 침실에서 시를 읽고, 편지를 쓰고, 차를 마셨다.

손님이 방문하면 그들은 옛친구처럼 함께 얘기를 나누며 지냈지만, 일단 집안으로 들어가면, 낯선 사람처럼 서로 내왕하지 않았다.

이 혼인은 이제 명존실망(名存實亡)이다.

진서형은 여전히 그의 "좋은 남편"이라는 체면을 유지했다. 그녀를 위해 먹을 것을 남겨주었고, 그녀가 좋아하는 우롱차를 사다주었지만, 더 이상 애정을 논하지는 않았다.

능숙화는 마치 침묵으로 침묵에 대응하는 듯했다. 그녀는 해명하지도 않았고, 사과하지도 않았으며, 관계를 회복하고자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공동으로 딸을 길렀다. 명절이 되면 일가족 3명은 함께 외출을 나서고, 정원을 산책하고, 곤곡(昆曲)을 들었다.

그러나, 일단 귀가하고나면 각자 자신의 방으로 갔다. 세 사람은 마치 한 지붕아래 사는 손님들 같았다.

그는 어떤 때는 한밤중에 글을 쓰다가, 참지 못하고 굳게 잠긴 문을 쳐다보기도 했다.

그는 그녀가 아직 자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마도 천정을 쳐다보며 멍하니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문을 두드리지는 않았다.

세월이 하루하루 지나갔고, 능숙화는 여전히 문단, 화단에서 활약했다. 수시로 중국과 외국의 문화교류활동에 초청을 받아 참석한다.

그리고 진서형은 학술적으로는 꾸준히 발전했지만, 감정적으로는 갈수록 메말라간다.

어떤 사람은 그가 말년에 쓴 산문은 항상 차가웠고, 인정미가 결핍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는 각자 따로 살았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그를 떠나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질책하지 않았지만,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

1970년, 진서형이 병사한다. 한 보통의 저녁, 그는 보모에 의해 쇼파에서 발견된다. 품에는 펼쳐진 책 한권을 안고 있었다.

능숙화는 직접 진서형의 장례를 처리한다. 그녀는 그다지 많은 사람들에게 알라지 않았고, 성대한 추도사를 하지도 않았다. 단지 영당(靈堂)에 몇 폭의 두 사람이 젊었을 때 같이 찍은 자신을 놓아두었다.

영당은 조촐했고, 조문오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옛날의 학생이나 함께 지내던 동료였다.

능숙화는 직접 묘지를 골라 두 사람의 고향의 어느 산언덕에 오래된 홰나무숲(古槐林) 근처로 잡았다.

그녀는 그를 위하여 석비를 만들었는데, '진서형지묘(陳西瀅之墓)'라고 적었다. 글자는 단정했고, 왼쪽에는 또 다른 한 문구를 쓸 공간을 남겨둔다: '능숙화합장어차(凌叔華合葬於此)'

합장은 그녀의 선택이었다.

1990년 능숙화가 북경에서 별세하고, 진서형과 합장된다.

진서형의 여생은 이 풀리지 않은 혼인 속에서 조용히 메말라갔고, 능숙화의 말년도 진정한 애정의 의지를 얻을 수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한 곳에 합장되었지만, 진정으로 화해한 것은 아니었다. 이 혼인은 사람들로 하여금 탄식하게 하고 깊이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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