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처사첩(三妻四妾)"은 어떤 의미였을까?

 "삼처사첩(三妻四妾)"은 어떤 의미였을까?

글: 소당거탐안(酥糖去探案)

고전드라마를 보거나, 고대소설을 읽을 때면, "삼처사첩"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서문경(西門慶)의 집이든 아니면 고관대작의 저택이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고대인들은 돈이 있고 권세가 있으면, 3명의 처, 4명의 첩을 거느릴 수 있어, 오른쪽 왼쪽으로 끌어안고 자녀들을 많이 두면서 아주 재미있게 살 수 있었겠구나라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농담조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타임슬립을 해서, '삼처사첩'의 신선같은 생활을 한번 해보고 싶다고.

그러나 나는 감히 단언할 수 있다. 90%의 사람들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인들이 자주 말했던 "삼처사첩"은 근본적으로 "3명의 처, 4명의 첩"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보통백성은 말할 것도 없고, 부귀한 집안에서라도 '삼처사첩'을 거느리지는 않았다.

여기에서는 진실한 고대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면서 "삼처사첩"의 내력을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문언문으로 쓰지도 않을 것이고, 의미없는 사료를 소개하지도 않겠다. 사람의 말로 하기 때문에 한번 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삼처사첩"은 복이 아니라, 등급, 법도와 무수한 여자들의 부득이한 상황을 감추고 있다. 심지어 "삼처" "사첩"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안다면 당신이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장승업(張承業)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명나라중기 강남의 부유한 상인이고, 집은 소주부(蘇州府)에 있었다. 주로 비단장사를 했고, 집안은 재산이 넉넉했으며, 현지에서는 명망을 가진 사람이었다.

장승업이 젊었을 때, 부모가 나서서, 같은 동네의 큰집안인 육(陸)씨집안의 딸과 결혼한다. 육씨집안과 장씨집안은 문당호대(門當戶對)의 걸맞는 집안이었고, 육씨는 글도 알고 이치도 알며, 단장하고 현숙했다. 두 사람이 결혼할 때, 장씨집안은 <예기(禮記). 혼의(昏義)>에 기재된 "육례(六禮)"를 모두 치르면서, 한단계 한단계 납채(納采), 문명(問名), 납길(納吉), 납징(納徵), 청기(請期), 친영(親迎)의 모든 과정을 거쳤고, 행사는 아주 융중했으며, 전체 소주부를 떠들썩하게 했었다.

결혼후, 육씨는 집안일을 하면서 시부모를 모시고, 장씨집안을 아주 잘 관리했으며, 장성업과 시부모의 사랑을 받았다. 고대의 법도에 따르면, 육씨는 장승업의 "정처(正妻)"이다. 즉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대부인(大老婆)"이다. 그녀의 장씨집안에서의 지위는 장승업의 부모 바로 다음갔고,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은 모두 그녀가 결정했다. 나중에 장승업이 들인 첩실들조차도 그녀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육씨가 장승업과 결혼한지 3년이 지나도록 자식을 낳지 못했다. 고대에, "불효에 세 가지가 있는데, 후사를 두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크다(不孝有三, 無後爲大)". 특히 장씨집안처럼 부유한 상인집안에서는 집안의 후사를 잇는 것을 매우 중시했고, 제사가 끊어지는 것을 우려했다. 장승업의 부모는 마음이 조급해졌고, 장승업에게 첩을 들여 장씨집안의 후사를 이으라고 재촉한다.

장승업은 비로 부인과의 애정이 깊었지만, 부모의 재촉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더더구나 '후사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효이다'라는 예교의 법도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 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고대의 법률에 따르면 자신은 정처를 한명만 둘 수 있고, 다시 육씨와 지위가 동등한 처를 취한다면, 그것은 "예에 어긋난다"는 것을. 그렇게 되면 이웃과 동네사람들에게 욕을 먹게 될 뿐아니라, 관청에서도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당률소의(唐律疏議)>에는 명확히 기재되어 있다: "첩은 비천한 자이다(妾乃賤類)". "첩을 처로 삼는 자는 유기징역 1년반에 처한다(以妾爲妻者, 徒一年半)" 첩을 처로 바꾸면 유기징역 1년반에 처할 정도이니, 처를 두명 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리저리 생각해보고 장승업은 할 수없이 법도에 따라 첩을 한명 들인다. 그 첩의 성은 진씨(陳氏)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며, 장승업의 먼 친척뻘이었다. 조실부모한 후, 장씨집안에서 거두어 길렀고, 나중에 장승업의 첩이 된 것이다. 진씨는 온순하고 능력이 있었으며, 육씨에게 공경했고 절대로 그녀와 총애를 다투지 않았다. 그리하여 금방 장승업도 그녀를 잘 대해주게 된다.

다시 2년이 흘렀고, 육씨는 여전히 자식을 낳지 못한다. 진씨는 딸만 하나 낳는다. 장승업의 부모는 더욱 조급해진다. 그리하여 다시 첩을 들이도록 재촉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너는 지금 집안의 재산도 많으니, 법도에 따르면, 첩을 몇몇 더 들이더라도 무방하다. 그저 아들만 낳아서, 후사를 이을 수만 있다면 좋은 일이다."

이번에는 장승업이 한꺼번에 3명의 첩을 들인다: 한명은 사업파트너가 보내온 시녀로 성은 류(劉)이고 가무(歌舞)에 능해서, 손님들을 접대할 때 함께 했다. 다른 한명은 빈곤한 서생의 딸로 성은 주(周)이고, 글도 알고 이치도 알았다. 장승업과 함께 책을 잃으면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마지막 한명은 육씨가 시집올 때 데려온 시녀 오씨(吳氏)이며, 육씨의 심복이다. 그녀는 육씨를 도와 집안의 첩들과 하인들을 관리하는 것을 도왔다.

이렇게 하여, 장승업의 집에는 정처 1명, 첩 4명이 있게 된다. '삼처사첩'의 '사첩'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삼처'는 시종 단지 1명이었다. 이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고대인들이 '삼처사첩'이라고 했는데, 왜 장승업은 처가 오직 1명뿐인가? 설마 '삼처'라는 건 다른 걸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 우리는 지금까지 "삼처사첩"의 진정한 의미를 오해했었다. 고대에 근본적으로, "동시에 3명의 처를 취한다"는 법도는 없었다. 서주(西周)시대부터 시작하여, 중국은 "일부일처다첩제(一夫一妻多妾制)"를 취했다. 핵심은 바로 "정처는 오직 1명뿐"이라는 것이다. "삼처"라는 것은 지위가 평등한 정처가 3명이라는 뜻이 아니고, 서로 다른 신분과 서로 다른 역할의 '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종류의 처는 절대로 동시에 하나의 가정내에 존재할 수 없었다.

장승업의 이야기에다가, <예기>, <당률소의> <대명률(大明律)>등 사료의 기재를 종합해보면, 우리는 "삼처"가 도대체 어떤 세 유형의 처를 이야기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제1처(第一妻): 정처(正妻). 적처(嫡妻) 혹은 원처(元妻)라고도 부른다. 장승업이 취한 육씨가 바로 이 유형이다.

정처는 남자가 명매정취(明媒正娶)한 첫번째 처이다. 반드시 문당호대하고, '육례'의 모든 과정을 거쳐야만 법률과 예교상으로 '정실(正室)'로 인정받는다. 지위가 가장 높다. <예기.내칙(內則)>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빙(聘)한 경우에는 처(妻)이고, 분(奔)한 경우에는 첩(妾)이다(聘則爲妻, 奔則爲妾)" 그 의미는 정식으로 결혼절차를 통해 취하면 정처가 되는 것이고, 정식절차를 거치지 않고 그냥 온 것이라면 첩이라는 것이다. 이는 처와 첩의 본질적인 구분이다.

정처의 직책은 집안일을 책임지고, 시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를 교육하며, 첩과 하인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녀가 낳은 아들은 적자(嫡子)이고, 가족의 재산과 작위에 대한 우선적인 상속권을 갖는다. 딸은 "적녀(嫡女)"로, 지위가 다른 첩실들이 낳은 "서녀(庶女)"들보다 훨씬 높았다. 정처가 자식을 낳지 못하더라도, 남자는 함부로 그녀를 버릴 수도 없고, 더더구나 또 다른 정처를 들일 수도 없다. 그저 첩을 들이는 방식으로 후사를 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처의 지위는 남자와 평등하다. 남자가 죽은 후에는 정처가 집안일을 주재하며, 심지어 서자, 서녀들도 기르며, 일부 가족재산을 상속받는다; 만일 남자가 죄를 범하면 정처는 연루되지 않지만, 첩은 관청에 몰수되어 노비로 전락할 수 있다.

제2처(第二妻): 계처(繼妻). 전방(塡房)이라고도 부름. 정처가 죽거나 이혼한 후, 남자가 재취한 처를 가리킴.

장승업의 정처 육씨가 불행하게도 세상을 떠난다면, 장승업은 집안일을 처리하고, 후사를 잇기 위하여 다시 한번 문당호대의 여자를 처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런 여자를 "계처"라 한다. 계처는 비록 정처이지만, 지위는 원처(元配正妻)보다 약간 낮다. 그녀가 낳은 아들은 비록 적자이지만, 상속권에서는 원처소생의 적자들보다 후순위가 된다.

<대명률>에 이런 규정이 있다: "계처는 원처가 죽고나서 다시 취한 처이다. 그 지위는 원처의 다음가고, 낳은 적자는 원처의 적자보다 상속에서 앞설 수 없다." 니는 계처의 지위와 권리를 명확히 한 것이다. 그리고, 계처는 시집온 후 반드시 원처소생의 자녀를 잘 돌보아주어야 하고, 가혹하게 대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불현(不賢)"한 것으로 취급하여, 이웃과 동네에서 욕을 먹을 뿐아니라, 심지어 이혼당할 수도 있다.

역사상 북송의 문학가 소식(蘇軾)의 부친 소순(蘇洵)의 경우, 원처인 정씨(程氏)가 사망한 후, 다시 계처 왕씨(王氏)를 들였다. 왕씨는 시집온 후, 소식과 소철 형제를 잘 돌보아주고, 정씨의 가족들도 잘 대해주었다. 그리하여 후인들에게 '현처(賢妻)'라고 칭송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계처의 전형적인 경우이다.

제3처(第三妻): 평처(平妻). 편처(偏妻)라고도 부른다. 이런 경우는 아주 특수하고, 드문 경우이다. 그리고 모든 부귀한 집안에서 가진 것도 아니다.

평처는 주로 명청시대에 나타났다. 그리고 상인계층에서 존재했다. 당시 상인들은 외지에서 장사를 하기 위해 떠나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서로 다른 지방에서 사업을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외지에서 다시 처를 취하여 현지의 집안일과 장사를 돌보게 했다. 이런 처를 '평처'라 불렀다. <이원총화(履園叢話)>에는 명청시대 상인들이 "다른 지방에 평처를 취하는(異地娶平妻)" 현상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외지에서 장사를 하면서, 그곳에서 부인을 취하는데, 평처라고 불렀는데, 원배(原配)와는 구분되었다."

평처의 지위는 정처와 첩실의 중간쯤이다. 첩실보다는 높지만, 정처보다는 낮다. 그녀는 '육례'의 모든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고, 정처와 같은 집에서 거주할 수도 없다. 그저 상인이 외지에 장만한 집에 거주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평처가 낳은 자녀는 비록 적자, 적녀이지만, 지위는 정처소생의 자녀들보다 낮다. 상속권도 후순위이다.

주의할 점은 평처는 관방의 예법상 인정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단지 민간상인계층에서 사업의 편의를 위해 형성된 관례이고, "법외특례(法外特例)"에 해당한다. 장승업의 경우, 만일 그가 항주, 양주 등지에서 비단장사를 위해 오랜 기간 머물게 된다면, 아마도 현지에서 평처를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평처는 그저 현지에서 집안일을 할 뿐이지, 소주부로 올 수는 없고, 정처인 육씨와 대등하게 앉을 수도 없다. 더더구나 장씨집안의 족보에 올라가지도 못한다. 일단 상인이 사망하면, 평처와 그녀의 자녀들은 정처의 집안사람들에게 배척받고, 버림받아, 최후가 매우 처참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이러하다: "삼처"는 정처, 계처, 평처의 3가지 유형의 처를 가리킨다. 절대로 동시에 하나의 가정에 존재할 수 없다. 한명의 남자는 동일한 시간에 그저 1명의 정처만 둘 수 있을 뿐이다. 계처는 정처가 사망한 후에 대체되는 것이고, 평처는 상인이 다른 지방에서 장사를 할 때의 특례이다. 그리고 평처의 지위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고인이 말하는 "삼처"는 3명의 정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3종류의 서로 다른 신분의 "처"를 가리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일부일처"제도의 연장이다. 이건 우리가 TV드라마를 볼 때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삼처"를 설명했으니, 이제는 "사첩"을 살펴보기로 하자. 사첩은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 그것은 4명의 서로 다른 신분,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첩을 가리킨다. 그리고, "사(四)"는 고정된 숫자가 아니다. 단지 고인들이 첩실의 수량이 많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사용된 것이다. "삼처"의 "삼"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3명일 필요는 없다. "사첩'은 3명일수도 5명일수도,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통상적인 상황하에서, 부귀한 집안의 첩은 이 4가지 유형으로 들이게 된다. 이 4가지 유형의 첩은 장승업의 집안에서 모두 대응되는 사람을 찾을 수가 있다.

사료와 장승업의 이야기를 종합해서, "사첩"의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살펴보자. 여기에는 중국고대여성들의 부득이함과 무력감이 숨겨져 있다.

제1첩(第一妾): 잉첩(媵妾). 배가첩(陪家妾)이라고도 부른다.

장승업의 집안에 있던 오씨(吳氏)가 바로 이 유형이다. 정처가 시집올 때 데려온 시녀 혹은 동족여자이다.

잉첩의 역사는 매우 유구하다. 일찌감치 주(周)나라때부터 있었다. <의례(儀禮).사혼례(士昏禮)>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잉(媵)은 보낸다(送)는 뜻이다. 딸을 따라가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 뜻은 잉첩은 여자가 출가할 때, 신부와 함께 신랑의 집으로 가는 사람을 가리킨다. 대부분은 신부의 여동생, 조카, 혹은 시녀이다. 지위는 첩들중에서 가장 높고, 정처의 바로 다음간다. 주요직책은 정처를 도와 집안 일을 처리하고, 남편을 돌보며, 동시에 정처의 남편집안에서의 '눈'이 되어, 다른 첩실들이 총애를 다투는 것을 방지하고, 정처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장승업의 정처 육씨는 출가할 때 자신의 시녀 오씨를 데리고 왔다. 나중에 오씨는 장승업의 첩이 되니 바로 잉첩이다. 오씨는 육씨에 충성스러웠다. 육씨를 도와 집안사무를 처리했을 뿐아니라, 육씨를 도와 다른 3명의 첩들도 감시한다. 일단 첩실이 총애를 다투려 하거나, 법도를 어기는 일이 발생하면, 오씨는 바로 육씨에게 알려서, 육씨가 지위를 공고히 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잉첩이 낳은 자녀는 지위가 다른 첩실이 낳은 자녀들보다 높았다. 만일 정처가 자식을 낳지 못하면, 잉첩이 낳은 자녀가 정처의 양자로 들어가 적자(嫡子)가 되여 상속권을 가질 수도 있었다.

제2첩(第二妾): 양첩(良妾). 귀첩(貴妾)이라고도 한다.

장승업의 집안에서 주씨가 바로 이 유형이다. 출신이 깨끗하며, 대부분은 가난한 서생이나, 하급관리의 딸이다.

양첩의 출신은 비록 정처나 계처만 못하지만, 그래도 깨끗한 집안의 딸이다. 그녀가 첩이 된 이유는 대부분 집안이 몰락하여, 가난해졌기 때문이다. 살아가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부귀한 집안의 첩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양첩은 잉첩처럼 정처에 빌붙을 필요가 없다. 그녀들은 대부분 글을 알고 이치를 알며, 용모가 출중하다. 주요 직책은 남편과 함께 글을 읽고,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동시에 정처를 도와 집안 사무를 처리하고, 자녀를 교육시킨다.

<몽계필담(夢溪筆談)>에는 송나라때의 한 양첩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 많은 빈곤한 서생의 딸들은 부귀한 집안에 양첩으로 들어갔다. 그녀들은 "글을 알고, 시와 문장에 능하며, 항상 주인의 곁에 함께 있었다. 비록 첩이지만 주인으로부터 공경받고 중시받았다." 장승업이 들인 주씨는 바로 이런 양첩이다. 그녀는 빈곤한 서생집안 출신으로 글을 많이 읽어서, 항상 장승업과 함께 책을 읽고, 시를 쓰며, 장승업의 사랑을 받았다. 지위는 잉첩 오씨의 바로 다음갔다.

제3첩(第三妾): 양가첩(良家妾). 보통첩(普通妾)이라고도 부른다.

장승업의 집안에 있는 진씨(陳氏)가 이런 유형이다. 보통의 평민집안 출신으로, 특수한 재주도 없고, 강력한 집안배경도 없다.

이런 유형의 첩이 가장 많다. 그녀들은 대부분 집안이 빈고하고, 부모에 의해 부귀한 집안에 팔려와서 첩이 된다. 혹은 아는 사람의 소개를 받아 첩이 된다. 지위는 양첩보다 낮다. 주요 직책은 집안일을 처리하고, 남편과 정처를 모시며,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이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명나라때 민간에서 첩을 들이면 대부분 이런 양가첩이었다. "서인납첩(庶人納妾), 댜취평민지녀(多取平民之女), 이속향화(以續香火), 리가사(理家事)"(서민이 첩을 들이면 대부분 평민의 딸이었다. 첩을 통해 후사를 잇고, 집안일을 처리하게 했다.)

진씨가 바로 이런 유형이다. 그녀는 부모가 일찌감치 죽고,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장씨집안에 거두어졌고, 온순하고 능력이 있어 장승업의 첩이 된다. 그녀는 시문에 능하지도 못하고, 가무를 잘하지도 못했다. 매일 후원의 잡무를 처리하고, 육씨와 장승업을 모셨다. 나중에 딸을 낳은 후에는 지위가 약간 안정된다. 그러나 여전히 조심스럽게 생활하고 절대 선을 넘지 않았다.

제4첩(第四妾): 천첩(賤妾). 시첩(侍妾)이라고도 부름.

장승업 집안의 유씨가 바로 이런 유형이다. 출신이 가장 미천하고, 대부분은 시녀, 아환(丫鬟), 전쟁포로, 심지어 풍진여자(風塵女子)로, '천적(賤籍)'에 속하며, 인신자유가 없었다.

천첩의 지위는 모든 첩들 중에서 가장 낮았다. 그녀들은 대부분 주인이 사오거나, 누군가 선물로 보내온 경우, 혹은 주인이 일시적으로 마음이 동해서 첩으로 거둔 경우이다. 어떤 문서를 작성하지도 않고, 주인은 언제든지 그녀들을 처분할 수 있었다. 심지어 마음대로 남에게 줘버리거나, 매매하기도 했다. <사기.여불위열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여불위는 자신의 천첩인 조희(趙姬)를 진장양왕(秦莊襄王)에게 선물로 보냈다. 이를 보면, 천첩은 고대에 기본적인 인격이나 존엄도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장승업의 첩실인 유씨는 사업파트너가 보내온 시녀였고, 장승업에 의해 첩으로 거두어진다. 그녀는 가무에 능했고, 주로 장승업이 손님들을 접대할 때 노래부르고 춤을 추면서, 술자리의 흥을 돋구었다. 평소에는 장승업이 부르는 경우가 드물었고, 집안일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심지어 다른 첩들과 대등하게 자리에 앉을 자격조차 없었다. 일단 잘못을 범하면, 얻어맞고 욕을 먹고, 징벌을 받기도 하며, 심지어 집에서 쫓겨나기까지 한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이제 알았을 것이다. 고인들이 말하는 "삼처사첩"은 글자의 의미대로 "3명의 처, 4명의 첩"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3가지 처의 신분 + 4가지 첩의 유형"을 가리킨다는 것을. 본질적으로는 "일부일처다첩제"이다. 핵심은 등급이 삼엄하고, 적서구분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삼처사첩"은 보통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복'이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은 대부분 집안이 가난하여, 처 1명조차도 맞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무슨 첩을 들일 수 있겠는가. 부귀한 집안이라고 하더라도, 첩을 들이려면 재력도 있고, 법도도 있다. 들이고 싶다고 언제든지 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삼처"이건 "사첩"이건, 그 배후에는 고대여성의 비극이 있다. 그녀들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 정략결혼의 도구가 되거나, 아이를 낳고 기르는 기기가 되거나, 마음대로 처리되어, 평생동안 등급과 법도의 족쇄이 갇혀 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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