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오사필의(吾事畢矣)와 문천상(文天祥)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오사필의(吾事畢矣)와 문천상(文天祥)

글: 홍장호

이번 사자성어는 오사필의(吾事畢矣. 나 오, 일 사, 마칠 필, 어조사 의)다. 앞 두 글자 ‘오사’는 ‘내가 해야 할 일’이란 뜻이다. ‘필의’는 ‘이제 마무리됐다, 즉 마침내 끝맺었다’란 뜻이다. 이 두 부분이 합쳐져, ‘맡은 책무를 성공적으로 끝마치다’란 의미가 만들어졌다.

문천상(文天祥). 바이두

문천상(文天祥. 1236-1283)이 처형 당일 원(元)나라 옥졸과 나눈 대화에서 유래했다. 지금도 ‘오사필의’는 ‘난관을 헤치고, 나에게 부여된 임무를 완수했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문천상은 남송(南宋. 1127-1279)의 정치가 겸 장수였다. 천상은 그의 자(字)고, 본명은 운손(雲孫)이다. 남송 최후의 승상(丞相)이기도 했던 그는 장세걸, 육수부와 함께 ‘남송삼걸(南宋三傑)’로 칭해지기도 한다.

그가 태어날 즈음, 부친은 한 아이가 보라색 구름을 밟으며 걷는 태몽을 꿨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던 그는 피부가 곱고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21세엔 과거에 1등으로 합격하고 진사(進士)가 됐다.

그러나 당시 남송의 국운(國運)은 그야말로 풍전등화(風前燈火)였다. 지금의 동유럽까지 전선을 확대하며 무패(無敗) 신화를 이어가던 몽골군과 힘겨운 전투를 벌이며 아슬아슬하게 연명하고 있었다. 몽골군의 위협이 더욱 거세지자 고위 관료들은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한다.

문천상(文天祥) 동상. 바이두

수도 이전은 사기를 떨어뜨리는 궁여지책(窮餘之策)일뿐이다. 오히려 결연하게 적에 맞서야 살 길이 열린다. 이렇게 판단한 문천상은 비록 신진 관료 신분이었지만 천도(遷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나약한 조정은 바로 그를 면직시켰다.

그러나 그는 의기소침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몽골 기병(騎兵)에 정면으로 맞서는 길을 집요하게 모색한다. 전투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1만 명 정도의 의병을 모집해 직접 지휘했다. 집권층이 교체되고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자, 자신의 안위를 전혀 따지지 않고 동분서주했다. 40세엔 담판을 위해 위험한 적진에 파견됐다가 포로 신세가 된다. 이 와중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남송 황실은 원나라에 항복하고 멸망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문천상은 포기하지 않았다. 포로가 되어 북쪽으로 압송되던 도중에 그는 탈출한다. 이어 장세걸, 육수부와 힘을 합쳐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고 계속 저항했다. 그러나 42세에 큰 전투에서 패배하고 다시 포로가 됐다. 지금의 베이징(北京)으로 압송된 그는 지속적인 회유를 받았으나, 완강히 거절했다.

중국 원나라 초대 황제 쿠빌라이. 바이두

하루는 이미 항복해 원나라 관료가 된 친형이 그를 설득하기 위해 감옥으로 방문했다. 그는 형의 권유를 차갑게 거절한다. 심지어 체포되어 곤경에 처한 딸아이의 안부 편지를 받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보고를 통해 사안의 심각성을 감지한 쿠빌라이는 결국 그를 직접 만나 진의(眞意)를 파악하기로 결심한다.

쿠빌라이가 질문했다. “원하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문천상이 담담한 톤으로 대답한다. “저는 송나라 은혜를 크게 입은 사람입니다.

재상 지위까지 올랐던 몸으로 두 나라를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냥 저를 얼른 죽여주십시오.” 이 요지부동(搖之不動)의 대답을 듣고 쿠빌라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단호한 어조로 처형을 지시했다.

옥중에 있는 문천상. 바이두

감옥에 갇혀 지내던 문천상은 그렇게 최후를 맞는다. 옥중에서 고요한 마음을 마주하며 창작한 시 약 570수(首)가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정기가(正氣歌)’가 매우 인상적이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 상태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마지막 날엔 ‘오사필의’를 읊조렸다. 이때 그의 나이 47세였다.

오사필의. 이 네 글자에 담긴 기개와 긍지는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한 예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김동삼(金東三. 1878-1937) 선생의 옥중 유언이 새겨진 어록비가 독립기념관에 있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만해 한용운(韓龍雲)이 머물던 서울 심우장(尋牛莊)에서도, 만해가 그의 주검을 수습하여 5일장을 치러주었다는 내용의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다. ㅣ 더차이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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